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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지나친 성공이나 과도한 영광이 인생의 장애물이나 인생의 실패로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동서고금 2009. 12. 16. 16:54반응형
중단을 거부할 때 노력은 그만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나폴레옹 힐세상의 주목받는 인물들은 성공하기 전에 반드시 큰 장애물에 부딪쳤음을 역사가 증명해 준다. 그들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B.C.포브스
아카데미 영화상을 수상한 감독이며 연출자이고 작가인 우디 알렌은 뉴욕 주립 대학과 뉴욕 시립 대학의 영화 제작 과목에서 낙제 점수를 받았다. 또 뉴욕 주립 대학의 영어 과목에서도 낙제점을 받았다.
베스트셀러 (엑소더스)의 작가 레온 우리스는 고등학교 영어 과목에서 세 차례나 낙제 점수를 받았다. 미국 최고의 여자 코메디언 루실 볼은 1927년에 배우 수업을 시작했다. 이때 존 머레이 앤더슨 드라마 학교의 지도 교수는 그녀에게 말했다.
"다른 직업을 구해 보시오. 어떤 직업이라도 좋으니 제발 배우가 아닌 다른 직업을" 1959년에 유니버셜 영화사의 책임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버트 레이놀즈를 동시에 해고시켰다. 버트 레이놀즈에게는 "당신은 배우가 될 소질이 전혀 보이지 않아."라고 말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앞니가 하나 깨졌고, 목의 울대가 너무 많이 튀어나왔어, 게다가 당신은 너무 말을 천천히 하거든." 모두가 알다시피 버트 레이놀즈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훗날 할리웃 영화 산업의 대스타가 되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오디션에서 코가 너무 크고 치아가 튀어나왔기 때문에 배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잉그리드 버그만은 "난 내 코가 좋아요." 하고 소리쳤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가스등), (카사블랑카) 등에 출연해 세계 영화 팬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감동을 남겼다. 1944년에 블루 북 모델 에이전시 회사의 책임자 에멀린 스니블리는 모델을 희망하는 노르마 진 베이커 (마릴린 먼로)에게 말했다. "당신은 비서일을 찾아 보든지 아니면 일찌감치 결혼을 하는 게 좋겠소."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에 두 번이나 후보로 오른 리브 울만은 일찍이 노르웨이의 국립 연극 학교 오디션에서 탈락했었다. 시험관은 그녀에게 전혀 배우가 될 가능성이 하나도 엿보이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말콤 포브스는 프린스톤 대학 시절에 학교 신문기자 시험에 응시했지만 보기 좋게 탈락했다. 하지만 그는 훗날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최고의 경제 잡지 (포브스)의 발행인이 되어 이름을 날렸다.
1962년에 젊은 음악도 네 명이 긴장한 얼굴로 데카 레코드 회사의 간부들 앞에서 첫 번째 레코딩 오디션을 받았다. 간부들은 아무런 인상도 받지 못했다. 훗날 (비틀즈)라고 불리는 영국 록그룹이 된 이들 젊은이에게 한 간부는 말했다.
"우린 자네들의 소리가 맘에 들지 않아. 통키타를 쳐 대는 것은 이미 한물 갔거든." 데카 레코드 회사의 파울 코헨은 1956년에 버디 홀리를 해고하면서 홀리에게 "내가 여지껏 함께 일한 가장 재능 없는 친구?"라고 혹평했다.
20년 뒤 (롤링 스톤) 지는 척 베리와 함께 버디 홀리를 ’6o년대 록 뮤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했다. 그랜드 올 오프리의 매니저 짐 데니는 1954년에 단 한번의 공연을 한 뒤에 곧바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해고했다.
그는 프레슬리에게 소리쳤다. "자넨 음악적인 미래가 없어. 트럭 운전수로 돌아가라구." 엘비스 프레슬리는 훗날 미국 역사상 가장 사랑 받는 대중 가수가 되었다. 알렉산더 그레이험 벨이 1876년에 전화기를 발명했을 때 주위에는 그를 후원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시범 통화를 해본 뒤 루더포드 헤이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놀라운 발명품이오. 하지만 세상에 누가 이런 쓸데없는 물건을 사용하게 되겠소? 토마스 에디슨은 미국 역사상 아마도 가장 위대한 발명가일 것이다.
에디슨이 미시간 주의 포트 휴론 초등 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사들은 그가 너무 ’느려 터지고’ 다루기 힘들다고 불평을 했다. 그 결과 에디슨의 어머니는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집에서 직접 에디슨을 가르쳤다.
어린 에디슨은 특히 과학에 높은 흥미를 보였다. 불과 열 살에 에디슨은 자신의 첫 번째 화학 실험실을 꾸밀 정도였다. 에디슨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천재성 (그 자신은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이라고 말했지만)은 일생 동안 1,300가지의 발명품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전구를 발명할 때 토마스 에디슨은 무려 2천번의 실험 끝에 성공했다. 한 젊은 기자가 그에게 그토록 수없이 실패했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는가를 묻자 에디슨은 말했다. "실패라니요? 난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난 단지 2천번의 단계를 거쳐 전구를 발명했을 뿐입니다."
1940년에 또 다른 청년 발명가 체스터 칼슨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20개회사에 제출했다.
그 중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기업체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 회사들 모두는 칼슨의 아이디어를 되돌려 보냈다. 무려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끝없이 거절 당한 끝에 마침내 1947년 칼슨은 뉴욕에 있는 할로이드 컴패니라는 작은 사업체에다 특허권을 팔 수 있었다.
칼슨의 발명품은 다름 아닌 전기 복사기였다. 할로이드 컴패니는 이 발명품으로 복사기 전문 회사로 발돋움했고, 칼슨과 회사 모두 돈방석에 앉았다.
존 밀턴은 44세에 장님이 되었다. 그로부터 16년 뒤 그는 (실낙원)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썼다. 95세가 된 파블로 카잘스에게 젊은 신문기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카잘스 선생님, 당신은 이제 95세이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루에 여섯 시간씩 연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는 대답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연주 실력이 아직도 조금씩 향상되고 있기 때문이오." 독일 작곡가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점차로 청력을 상실한 끝에 46세가 되자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애 후반기에 다섯 개의 교향곡을 포함해 가장 위대한 작곡들을 탄생시켰다.
영국 전투기 조종사 더글라스 베이더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뒤에도 의족을 단 채 영국 공군에 입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독일군에 세 차례나 포로가 되었으며, 세차례 모두 탈출에 성공했다. 월마 루돌프는 22명의 자식 중 20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월마는 조산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존 확률이 거의 없었다. 4살 때 폐렴에 성홍렬이 겹쳐 왼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그러나 9살이 됐을 때 월마는 다리에 차고 있던 금속 보조대를 스스로 떼어 내고 목발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13살 때 월마는 춤추는 듯한 이상한 걸음 걸이긴 하지만 혼자서 걸을 수 있었다. 의사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같은 해에 월마는 달리기 선수가 되었다. 경주에 참가한 그녀는 꼴찌로 들어왔다.
이후 몇 년간 월마는 모든 경기에 참가했으며, 언제나 꼴찌를 독차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일등으로 들어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또 다른 경기에서도 우승했다. 그 이후 그녀는 참가한 모든 경기마다 선두를 차지했다.
마침내, 다시는 걸을 수 없다던 이 어린 소녀는 올림픽에 참가해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엄마는 일찍부터 나에게 내가 강렬히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셨어요. 내가 첫 번째로 강렬히 원하던 것은 금속 보조대 없이 걷는 일이었어요."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39세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네 차례나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말했다.
"세상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한 단 한 가지는 바로 두려움 그 자신이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여배우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는 사라 베른하르트는 70세에 불의의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후 8년 동안 그녀는 배우 생활을 계속했다. 1백 편이 넘는 서부 소설을 써서 2백만 부 이상이 팔린 성공적인 작가 루이스 라모르는 첫 원고의 출판을 요청했다가 출판사들로부터 무려 350번의 거절을 당했다.
훗날 그는 역사에 기초한 작품으로 국가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돼 의회로부터 미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특별 메달을 받았다. 1953년에 줄리아 차일드와 두 명의 동료는 (미국 가정을 위한 프랑스 요리법)이라는 책을 쓰기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
줄리아와 두 명의 동료는 5년 동안 그 원고에 매달렸다. 그런데 출판사는 850쪽에 달하는 그 원고를 거절했다. 줄리아와 두 명의 동료는 원고를 재 수정하는 데 다시 한 해를 바쳤다.
또다시 출판사는 원고를 거부했다.
하지만 줄리아 차일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재 작업을 하는 한 편 1961년에 새로운 출판사를 만났다. 원고 쓰기를 시작한 지 8년만의 일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요리 예술의 대가가 되는 법)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했고, 이 책은 1백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1966년에(타임) 지는 줄리아 차일드를 커버 스토리에 실었다. 줄리아 차일드는 3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 분야의 정상을 달리고 있다. 전 세계인에게 사랑 받던 (슈퍼맨)의 주연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는 낙마 사고로 전신 마비의 장애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1년 뒤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휠체어에 온 몸과 머리를 묶은 채 기관지 튜브를 통해 호흡을 하면서 그는 뉴욕 북부 웨체스터 카운티 촬영장에서 배우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직접 몸으로 시범을 보일 수 없어 일일이 말로 설명해야 할 때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했다. "몸짓을 하지 못하니까 오히려 생각이 집중된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가 분명해지기 때문에 말이 예전보다 효과적으로 나오게 되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불굴의 의지가 없었다면 결코 권력과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에 응시했다가 두 번이나 낙방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응시해 합격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책 속으로 행진해 나아갔다.
웨인 그레츠키는 17세에 이미 뛰어난 운동선수였다. 그는 하키와 축구 중에서 한 가지 운동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는 하키 쪽을 택했다. 그가 프로 하키 팀을 찾아갔을 때 감독이 말했다.
"자넨 체중이 80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아. 너무 가볍지. 하키 선수들의 평균 체중은 100킬로그램이 넘어야 하네. 자넨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어." 그러나 그레츠키는 말했다. "난 하키 퍽(하키용 막대)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어요."
오늘날 웨인 그레츠키는 수백만 달러의 계약금에 백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는 세계 최고의 하키 선수가 되었으며, 일곱 차례나 MVP에 뽑혔다.
실베스타 스탤론은 정신적으로 외롭고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여러 학교를 전전했으며, 드렉셀 대학의 시험에선 엘리베이터 수리공이 적격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를 끝없이 두들겨 패면서 머리가 나쁜 쓸모 없는 놈이니 몸이나 단련하라고 소리쳤다.(이것은 영화 (로키)에 나오는 대사이기도 하다.)결국 배우가 됐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배워 나갔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스탤론은 말했다. "만일 내가 초기에 배우로서 성공했다면 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차츰 배역보다 글쓰기에 더 흥미를 가졌다. 성공이란 항상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난 실패했지만 그것을 할리웃의 중심 무대에 뛰어드는 계기로 삼았다."
어느 날 밤 스탤론은 무하마드 알리가 척 웨프너와 싸우는 경기를 시청하던 중 관중들의 함성과 패자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다. 그는 불과 3일 반 만에 영화 (로키) 대본을 썼다.
그리고 제작자들을 찾아가 자신에게 주연을 맡기는 조건으로 대본을 팔겠다고 말했다. 물론 처음엔 대부분의 제작자들이 거절했다. 그 다음은 세상이 아는 그대로다. (로키)는 1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오늘날 실베스타 스탤론은 2천만 달러 이상의 계약금에 수익금의 일부를 배당 받는 유명 배우로 자리 잡았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블랙호크 전쟁 때 장교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사병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니 드 비토는 키가 150센티미터에도 미치지 못했다. 아무도 그가 훗날 텔레비전 스타, 영화 배우, 감독으로 대성공을 거두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이 자신을 이기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그 자신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1952년에 에드먼드 힐러리는 세계 최고봉인 8천 7백 미터 높이의 에베레스트 정복에 도전했다. 도전에 실패하고 나서 얼마 뒤 그는 영국의 어떤 모임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연단 앞으로 걸어나온 힐러리는 주먹을 들어 벽에 걸린 에베레스트 사진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에베레스트여, 처음엔 네가 날 이겼다. 하지만 다음 번에는 내가 널 이기겠다. 왜냐하면 넌 이미 성장을 멈췄지만 난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한 해 뒤 인 5월 29일에 에드먼드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최초 등반자로 역사 속에 기록되었다.
-http://sstory.com, 꿈꾸는 요셉, <잭 캔필드, 마음을 열어 주는 101가지>
이 세상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고,
더 나아가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고 그저 일상을 무미건조하게 보내는 사람이 있다. 이들도 어찌 보면 인생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실패보다
더한 기권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실패한 사람들의 다수는 역경이나 고난 때문이라기 보다는
계획성없이 도전했거나,무모함으로 무장한 채 막연히 밀어붙였기 때문에 실패한 경우가 더욱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실패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힘든 사람은 젊은 시절 행운이나 요행수가 가져다는 한번의 성공에 매료되어 버린 착각인들이다. 본인의 진정한 능력을 모르고 보다 큰 성과에만 매달리고 본질에서 벗어난 일만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의 성공은 초반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그로부터의 교훈이 필수적일지도 모른다.'동서고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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